White-out, 2초의 여백

시야가 하얗게 지워진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진 것들에 관하여.”

아침에 눈을 떴다. 안경 없이 보는 천장이 흐릿하게 낯설다.

잠깐. ‘여기가 어디지?’ ‘난 누구지?’

하지만 그 공백은 길어야 2초. 기억과 함께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그러고 나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하아…
그럼, 그렇지!”

어제는 일본에서의 운전 첫날이었다. 강요당하는 아찔한 역주행(좌측통행)에, 당황스러운 우측 운전대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지난 며칠간 내렸다는 2미터의 폭설까지 더해졌다. 도로는 눈으로 단단히 다져진 상태였다. 공항에서 렌터카(a Toyota sleigh, 아니, sedan)를 픽업했다. Toyota의 승차감이야 익히 알지만, 이 ‘썰매’를 멈추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지역 일대는 대부분 꽃 농장이라지만 모든 것이 온통 새하얄 뿐이다. 도로보다 낮은 꽃밭은 발밑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눈이 쌓였다. 꽃밭에 내려서니 눈이 가슴까지 차올랐다.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 끝, 조그맣게 보이는 나무를 향해 2시간 가까이 걸었다. 걸었다기보다는 눈 속에 빠졌다가 기어 나오기를 반복했다. 누가 봤으면 실성한 사람이라 했을 게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길가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10미터쯤 갔을까. 갑자기 왼쪽 바퀴 두 개가 밭에 빠지더니, 오른쪽 바퀴들은 허공에서 헛돌았다. 차는 완전히 눈 속에 빠져 꼼짝달싹 못 했다. 순식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가는 차를 기다렸다. 중국인 가족 두 팀이 차를 멈췄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아이들까지 나와 차를 밀어 주었다. 한참을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난 오히려 그들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미안한 얼굴을 하며 떠났다. 나는 다시 기다리고, 다음 차를 또 세웠다. 내 또래로 보이는, 세련된 도시 분위기의 일본인 남녀 두 쌍. 일본의 어느 대도시에서, 시골로 여행을 온 듯했다. 그들에게 빌린 전화기로 렌터카 안내문의 “Foreigner 外國人” 전용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정작 전화를 받은 직원은 영어를 전혀 못했다. 우리는 잠시 함께 웃었다. 그들을 보내고 난 또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눈은 쉬지 않고 내렸다. 주변은 적막해졌다. 오후 네 시. 곧 해가 진다. 난 지나가던 큰 관광버스를 세웠다. 한인 관광버스였다. 한국 아저씨 6~7명이 나와서 차를 밀어도 보고 들어올리려고도 했지만, 플라스틱 범퍼와 펜더(fender)가 부서질 것 같아서 그것도 포기했다. 다행히 일본어에 유창한 가이드 아주머니가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당장 트럭을 보내라!”며 호통을 쳤다. 역시, 한국 아주머니와 함께라면 세상 어디든 든든하다! 그녀는 “이제 늦어서 우리 뒤로는 지나가는 차가 없을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정말로 그 뒤로는 아무도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눈은 꾸준히도 내린다. 조금 전엔 눈처럼 하얗고 작은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건너다 멈춰 서서 한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갔다. 2시간이 지났다. 세상은 이미 어두워졌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야 하나” 생각했다. 가이드 아주머니가 떠나기 전에, 얼른 QR 코드로 카카오톡을 연결해 주신 것이 생각났다. 전화를 했다. “아직 아무도 안 왔나? 내가 다시 전화하겠다!”

그로부터 또 한 시간 후. 마침내, 아랫동네 렌터카 사무실에서 착해 보이는 30대쯤의 직원이 도착했다. 한참을 이것저것 시도하더니 사무실까지 왕복 한 시간을 다녀오겠단다. “삽을 가지고 오겠다”고 한다. 난 기가 막혀 할 말이 없었지만 웃음은 참지 못했다. 견인 트럭을 부르자고 했더니 “홋카이도에서는 눈이 오면 견인 트럭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뭔 소린지…)

다시 한 시간이 흐르고, 그 착해 보이는 30대쯤의 직원이 더 착하게 생긴 50대쯤의 아저씨와 함께 나타났다. 아저씨에겐 진한 담배 냄새가 났다. 타고 온 밴에 밧줄을 묶어서 내 차를 눈 속에서 끌어냈다. 드디어 내 차가 천천히 눈 밖으로 나왔다.

그날 밤, 호텔 대욕장의 온탕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아침 잠결, 현실의 나로 돌아오기 전, 찰나 같은 순백의 유예는 종종 탈진하여 혼절하듯 잠든 다음 날 내리는 은총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 결국 나를 구한 것은 가던 길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준 타인들이었다. 도움을 준 이들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하며 감사를 전하고 싶다.

세상을 온통 뒤덮은 눈보라는 차가웠지만, 사람은 참 따뜻했다.

Epilogue

다음엔 같은 실수로 또 눈 속에 처박히고 싶지 않지만, 내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나도 모르니 과연 피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2 Comments

  • HWANG MIJIN

    이야기로 들었을때보다 글로
    그상황을 들으니 그 긴박함이 배로 느껴지네요..

    홋가이도 눈길위 이런 추억(?)을
    남기신거에
    잠깐 시샘도 했어요ㅋㅋ

    읽을때부다 글을 넘 잘 쓰셔서
    감탄합니다..

    • Paul Yoo

      고마워! ㅋㅋ 시샘이라니! 홋이야기로 전할 때보다 글로 썼을 때 더 선명해지는 감정들이 있더라고. 내 서툰 문장들 사이의 행간까지 읽어준 것 같아 기분이 좋네. 조만간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더 스펙터클한 뒷이야기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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